장미와 시

첫사랑

2747 2007. 12. 2. 20:46


 

 

 

마당에서 비눗물 장난을 하고 있었다
그 애의 퉁퉁 불은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
점심 전이었고
삼촌 방에선 정오를 알리는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
담장 밖 돼지우리에선 산달을 앞둔 커다란 몸이 뒤척이는 소리
아무래도 흘러나오는 것들이 유독 많았던 그 날
내 몸에서 비릿한 초경과 함께 울음이 흘러나왔고
학교에서 나를 데리고 온 그애 곁에서 문득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고 있었고
이북 방송을 다시 듣기 시작한 삼촌이
먼 길 가는 기러기들 행렬을 바라보며 한숨을 흘렸다
안방에서 자고 있는 막내 동생처럼 조용했지만
내 안의 피가 몽땅 흘러나가고 남모를 피로 조용히 바꾸어진 그 날 저녁
나는 기르던 토끼를
태연히 식구들과 둘러앉아 먹을 수가 있게 되었고
천천히 아주 천천히 핏빛 같은 노을이 떠내려가는 수챗구멍을 들여다보았다
아무래도 그 날부터였을 거다
내 몸이 둥싯 둥싯 보름달처럼 부풀기 시작했던 것은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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